글/하이큐 스가른

[다이스가]비좁은 버스는 사랑을 싣고

KKOTBI 2018. 5. 4. 16:41

  ‘, 좁아.’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여느 날처럼 스가와라는 퇴근하고 버스에 몸을 실었다. 보통 이 시간이면 한산했건만 오늘은 무슨 날인지 버스 안이 꽉 찼다. 다행히 자리는 있었다. 두 칸짜리 좌석이었지만. 평소 한 칸짜리 좌석을 좋아하는 스가와라는 아쉬워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두 칸이라고 해도 서서가는 것보다는 낫지. 뒤따라 다부진 체격의 남성이 옆에 앉았다. 차 안이 어두워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체격을 보아하니 운동을 좋아하는 삼십대 아저씨인가 하는 추측을 해보았다. 그러는 스가와라 본인 역시 삼십대가 얼마 남지 않은 이십대 중반이었지만.

  사람이 가득 차고 좌석은 비좁고, 산소가 부족해지는 느낌에 스가와라는 창문을 살짝 열었다. 살짝 선선한 바람을 맞으니 조금 숨통이 트였지만 옆에 앉은 덩치 큰 남자 때문에 갑갑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 이렇게 체격 좋은 남자가 제 옆에 앉다니. 스가와라는 갑갑한 이 상황에 슬슬 짜증이 났다. 하지만 저 남자가 잘못한 게 뭐가 있겠는가. 잘못이라면 단지 그동안 운동을 너무 열심히 해서 몸이 너무 좋다는 것 정도짜증을 표출하지 못하고 신경질만 더더욱 더해갔다.

  겨우 짜증을 참고 있었건만 이제는 옆에 앉은 남자가 스가와라를 흘금흘금 쳐다보기 시작했다. 스가와라가 핸드폰을 볼 때는 이쪽을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내리면 바로 고개를 돌렸다. 비록 직접 그 모습을 보진 못해도 눈치로 다 알 수 있지. 처음에는 핸드폰 화면을 보려는 것인가 싶었다. 그러나 핸드폰 화면을 끄고 그 까만 화면에 비친 모습을 보니 그 남자는 핸드폰 화면이 아닌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뭐지? 왜 남의 얼굴을 저리 빤히 쳐다보는 거야. 어떻게 할까. 핸드폰을 하다가 갑자기 확 돌아볼까? 스가와라는 어떻게든 이 치미는 짜증을 내뱉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결국 그가 택한 것은 정면돌파였다.

  “저기요,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요?”

  “!”

  여전히 어두워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남자는 꽤나 놀란 눈치였다. 그렇겠지. 제가 이렇게 갑자기 말을 걸 줄은 몰랐을 테니까. 제대로 말도 못하는 남자를 보고 스가와라는 더욱더 기가 찼다. 저렇게 소심하면서 무슨 용기로 자신을 쳐다봤담.

  “아까부터 그쪽이 절 쳐다본 걸 모를 줄 아세요?”

  “죄송합니다…….”

  “됐고, 왜 쳐다보신 건데요? 스토커예요?”

  “, , 절대로 스토커는 아니에요!”

  “그럼 왜 아까부터 힐끔힐끔 쳐다보셨는데요?”

  추궁이 이어지자 남자는 잠시 말이 없더니 주머니에서 자신의 명함을 꺼냈다. 갑자기 웬 명함? 뭐하자는 거냐고 묻기 전에 남자는 그 명함을 뒤집더니 자켓 안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그 위에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남자 분께 이런 말은 실례일지 모르겠지만 달빛에 비친 얼굴에 저도 모르게 그만... 죄송합니다.’

  남자가 깨알 같은 글씨로 명함에 남긴 쪽지를 건네려 고개를 드는 순간 마침 가로등 옆을 지나가며 남자의 얼굴이 명확히 보였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스가와라는 꽤나 놀랐다. 제법, 아니 무척이나 준수한 얼굴이었다. 그런 얼굴로 죄송해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하면서 명함을 내밀자 스가와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짜증났던 이유조차 희미해졌다. 심지어 약간은 귀엽게 여겨지기까지 했다. 조금 더 뭐라고 쏘아줄 작정이었지만 생소한 기분에 스가와라는 말없이 명함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명함 뒤에 적힌 글을 보고 더욱더 말을 잃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난데없이 받은 고백 비스무리한 그것에 뭐라고 답을 해야 한단 말인가. 그 순간이었다.

  [이번 정류장은 ㅇㅇ초등학교, ㅇㅇ초등학교입니다.]

  스가와라가 내려야 할 정류장명이 버스 안에 울려 퍼졌다. 어쩔 줄을 모르던 스가와라에게는 더없이 좋은 핑계였다.

  “, 저 지금 내려야해서.”

  급하게 내리려는 스가와라에게 그 남자는 다급한 목소리로 명함에 적힌 연락처를 통해 연락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스가와라는 그 말을 들은 체, 만 체하고 우선 내렸다. 고민의 시작이었다.

 

  스가와라의 고민은 3일째 이어지고 있었다. 연락을 하려고 했지만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명함을 집어들고 한숨만 쉬고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처음부터 짜증 가득이었던 만남이 민망한 것도 있지만 연락을 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 남자의 핸드폰 번호는 워낙 찍었다 지웠다를 반복해서 이제 외울 지경이었다. 3일이 지난 그날도 스가와라는 자신의 핸드폰에 그 남자의 번호를 입력했다. 한참 그 번호를 바라보다 한심한 자신에 한숨을 쉬며 다시 지우려던 순간이었다. 순간 손이 미끄러지면서 마치 만화 속 한 장면처럼 통화버튼이 눌려버렸다. 스가와라는 전에 없던 순발력으로 급히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는 머리를 싸매고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빠르게 껐다고 하더라도 연결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지잉- 스가와라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설마하며 핸드폰을 바라보니 그 남자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아니, 이 남자는 이게 스팸전화이면 어쩌려고 다시 걸고 난리야?! 스가와라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곤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통화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여보세요.”

  “. 사와무라 다이치입니다. 전화 주셨는데 끊겼길래 다시 걸었습니다. 누구신가요?”

  명함에 적혀 있는 이름을 그의 목소리로 들으니 새롭게 다가왔다. 다이치. 낮고 울림이 있는 목소리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이런 생각에 빠져 대답을 잊은 스가와라에게 수화기 너머로 재차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 기억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전에 버스에서 만났던.”

  “, 역시 그러시군요.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무슨 말로 이어야할까. 실수였다곤 하나 전화를 걸었는데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전혀 모르겠다. 전화로 날씨 이야기를 할 수도 없고 원. 날씨 이야기를 하기에 좋은 날도 아니었다. 다행히 저쪽에서 먼저 말을 걸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저는 사와무라 다이치라고 합니다. 혹시 성함을 여쭈어 봐도 될까요?”

  “, 죄송합니다. 아직 이름도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스가와라 코우시입니다.”

  “스가와라씨.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아름다운 이름이네요.”

  “감사합니다.”

  또 한 번의 정적. 어쨌건 제가 먼저 전화를 걸었으니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텐데 역시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 이번에도 저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

  “이렇게 전화를 주신 이유는 저를 만나주실 의향이 있는 건가요?”

  자신은 그를 만나고 싶은 것일까. 아직은 모르겠다. 그러나 전화를 걸어놓고 만나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을 농락하는 것밖에 되지 않겠지.

  “. 언제 시간되시나요?”

  “저는 평일엔 6시 이후로 가능합니다. 주말은 언제든 가능하고요. 스가와라씨는 어떤가요?”

  “. 내일은 야근이 있고 모레 630분 카라스노고등학교 근처의 00이자카야에서 술 한 잔 어때요? 술 싫어하신다면 그냥 식사 한 끼 해도 되고요.”

  “좋습니다.”

  “그럼 그때 만나요.”

  “. 전화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갑작스러운 만남 약속이라니. 스가와라는 자신에게 어이가 없어졌다. 미쳤어 스가와라. 이렇게 빠르게 약속을 잡다니. 나가서 무슨 말을 할지도 못정했는데. 스가와라는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의 회색 머리카락은 잔뜩 헝크러져서, 친구들이 더듬이라 부르는 위로 솟은 머리카락이 분간되지 않을 정도였다.

  약속의 날은 다가왔다. 스가와라는 여전히 자신의 마음을 모르고 있었다. 정말 나가도 되는 것인가 한참 고민을 하다 상사에게 오늘따라 왜 이리 집중을 못하냐며 한바탕 깨지기도 했다. 어찌어찌 일을 마치고 만나기로 한 이자카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오늘의 버스는 꽤나 한산했다. 좌석이 전부 찰 정도로는 사람이 있었지만 다행히 스가와라는 한 자리 좌석에 앉을 수 있었다. 분멍 스가와라는 한 자리 좌석을 선호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두 자리에 앉을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는 자꾸 두 자리 좌석을 돌아보기도 했다. 스가와라는 그런 제가 낯설기 그지없었다. 어차피 곧 만날 사람인데 뭐 하러 벌써부터 찾고 있는지.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버린 문 앞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그 순간 핸드폰이 지잉 울렸다.

  [사와무라 다이치입니다. 예상보다 일찍 도착해서 먼저 들어와 자리 잡았는데 연락주시면 나가겠습니다.]

  [아 저도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바로 읽은 모양인지 읽은 표시가 떴다. 스가와라는 핸드폰에서 고개를 돌려 이자카야 문 안을 바라보았다. 금방 문이 열렸다. 문에 딱 붙어있던 스가와라는 놀라 얼른 뒷걸음질 쳤다.

  “, 죄송합니다. 잘 보고 열었어야 하는데.”

  “아닙니다. 문에 바싹 붙어있던 제 탓이죠. 들어갈까요?”

  다이치 등 뒤를 따라 걸어 들어가면서 스가와라는 감탄했다. 과연 다부진 등이었다. 첫 만남에서는 짜증만 났던 어깨는 오늘따라 묘하게 다가왔다. 묘하다는 단어 외에 어떤 단어로 이 기분을 수식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그와의 술자리는 의외로 즐거웠다. 그는 무슨 말을 해도 즐겁다는 듯 들어주었고 적당한 리액션과 맞장구에 스가와라는 신이 나서 말을 꺼냈다. 그러다 문득 스가와라는 너무 자신의 얘기만 하는가 싶었다.

  “죄송해요. 너무 제 얘기만 했죠. 술도 마시고 신나서 그만.”

  “아닙니다. 제가 너무 말주변이 없어서 스가와라씨가 재미없어 하실까 걱정했거든요. 저는 스가와라씨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너무 좋아요.”

  벌써 취했나. 아직 제 주량의 반도 안마셨는데 스가와라의 귀에는 좋아요만 들렸다. 아니 그런 기분이었다. 스가와라는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었다. 무언가 대답을 해야 하는데, 그 생각이 들자 스가와라는 충동적으로 내뱉어버리고 말았다.

  “저도 좋아해요.”

  맙소사. 도대체 무엇을 좋아한다는 거야 스가와라, 이 멍청아! 급히 해명하기도 전에 다이치의 말이 들렸다.

  “다행이네요.”

  잠시 멍해진 스가와라를 보고 다이치는 다시 한 번 말을 꺼냈다.

  “그러면 우리 내일도 만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