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좁아.’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여느 날처럼 스가와라는 퇴근하고 버스에 몸을 실었다. 보통 이 시간이면 한산했건만 오늘은 무슨 날인지 버스 안이 꽉 찼다. 다행히 자리는 있었다. 두 칸짜리 좌석이었지만. 평소 한 칸짜리 좌석을 좋아하는 스가와라는 아쉬워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두 칸이라고 해도 서서가는 것보다는 낫지. 뒤따라 다부진 체격의 남성이 옆에 앉았다. 차 안이 어두워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체격을 보아하니 운동을 좋아하는 삼십대 아저씨인가 하는 추측을 해보았다. 그러는 스가와라 본인 역시 삼십대가 얼마 남지 않은 이십대 중반이었지만. 사람이 가득 차고 좌석은 비좁고, 산소가 부족해지는 느낌에 스가와라는 창문을 살짝 열었다. 살짝 선선한 바람을 맞으니 조금 숨통이 트였지만 옆에..
고민에 고민이 이어졌지만 아카아시 케이지가 할 수 있는 것은 부모님의 결정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붓을 드는 것이었다. 아카아시는 붓을 들어 자신의 마음을 종이 위에 시의 형태로 아로새겼다. 그렇게 쓰기 시작한 시는 한 구절이 두 구절이 되고 두 구절이 두 편이 되고 두 편이 셀 수 없이 많은 편으로 늘어났다. 자신의 마음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아카아시는 단 한 번도 시를 써본 적이 없었다. 붓을 든다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나오게 될 자신의 마음이 무서웠다. 마음속으로는 이미 수천편의 시를 쓰고 지웠지만 그것을 어떤 형태로 남기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다. 하지만 이제는 붓을 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전부 흘려보내자. 전부 흘려보내고 마음을 비워내자. 밤을 새워 수십 편의 시를 써낸 아카아시는 마지막으로 ..
“츠키시마, 사색에 빠진 얼굴이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서 말없이 웃었다. 역시 스가 선배의 눈은 정확했고 도저히 그에겐 무언가를 숨길 수 없었다. 나는 상념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그렇다’라고 말하기엔 부끄러웠다. 상념의 원인은 그였으니까. 오늘은 스가 선배의 졸업식을 보고나서라 그런가, 처음 입부했던 순간부터 현재까지가 머릿속에서 스쳐지나갔다. 선배를 기다리던 동안 식어버린 커피에 설탕을 뜯어 붓고 천천히 저었다. 한 모금 마시자 입 안에 서걱거림이 느껴졌다. 아직 커피가 식은 바람에 설탕이 잘 녹지 못한 탓이었다. 저 환한 사람이랑 어쩌다 내가 친해지게 되었을까. 스가 선배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교적인 사람이었다. 처음 만나는 우리들에게 서슴없이 말을 걸어주었다. 심지어는 냉담한 표정인 나에..
“다녀왔습니다.” “케이지 왔니? 너의 앞으로 편지가 와있어. 스가와라 코우시? 친구니?” “.......누구라고요?” “스가와라 코우시. 이렇게 읽는 거 맞니?” 아카아시는 한참 자신이 들은 말을 인지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감히 편지를 받아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상하게 여긴 그의 어머니가 몇 번이나 부를 때까지 정지되어 있었다. 마치 그의 주변에만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걱정스러운 표정의 어머니의 차가운 손이 볼에 닿자 겨우 정신을 차린 아카아시는 겨우 편지를 받아들고 이름을 확인했다. 스가와라 코우시. 깔끔한 필체로 쓰인 이름은 분명 그것이 맞았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이상하게 바라보는 어머니께 그 어떤 답도 하지 못한 채로 그는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물끄럼히 그가 내미는 담배 한 개피를 바라보았다. “나는 절대 못 피게 할 거라면서요.” “그래. 나도 후회할 거 아니까 지금 받지 않으면 영원히 얄짤 없어.” “누가 안 받는데요.”담배를 받아들고 한참 바라만 봤다. 그의 담배를 호기심에 빼들고 만지작거린 적은 있지만 이게 내가 곧 필 담배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히 그거나 이거나 같은 담배인데, 담배 종류도 같은 건데 왜 이렇게 생소하게 느껴질까. 그가 내미는 라이터도 받아든 채로 불은 붙이지 않고 쳐다보기만 하고 있으니 핀잔이 들려왔다. “눈으로 불 붙이냐.” “무드 없게. 막 영화 보면 담배로 불 붙여주던데.” “어쭈. 네가 뺏기고 싶지.”그는 그러면서도 불붙은 담배를 물고 다가왔다. “담배 물어봐.”나는 시키는 대로 담배를 물고 기다렸..
“헌혈하러 가자. 어때?” 청천벽력과 같은 한 마디였다. 헌혈을 하자고? 아, 잠시만. 순간 어릴 때 돈가스 사준다는 엄마의 말에 속아 주사 맞고 울면서 나오던 시절부터 일 년쯤 전 덜덜 떨면서 건강검진을 받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헌혈이라면 그거 기다란 바늘 꽂고 한참 있어야 하는 그거? 내가 아픈 것도 아닌데 내 몸에 바늘을 꽂는다고? 심지어 아플 때조차 주사는 절대 안 맞는 내가 헌혈.......? 말도 안 돼. 어떻게든 말려야 한다. “코우시, 정말로 헌혈하자고?” “응, 토오루 너 설마 무서워?” 응 무서워! 무섭다고! 나는 바늘이 무서워! 아프잖아! 하지만 이런 말을 코우시 앞에서 할 수 있을 리는 없다. 코우시한테 어떻게 내가 바늘을 무서워하는 겁쟁이라는 사실을 말할 수 있을까. “코우시, ..
“이제 꽤나 공기가 차네.” 푹푹 찌던 여름이 지나가고 드디어 가을이 왔다. 그토록 무더운 여름이 지나길 기다렸지만 왠지 오늘따라 다가오는 가을이 싫기만 했다. 가을을 타는 탓일까 옆이 허전한 탓일까. 나는 조용히 다시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그와 함께 했던 작년 이맘때쯤을 떠올렸다. 그리곤 괜히 들리지도 않을, 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머릿속으로 해보며 추억에 젖어들었다. 그때도 이렇게 침대 위에 누워있었지. 다만 지금과는 달리 스가와라 코우시, 네가 옆에 누워있었어. 너는 수족냉증이 있어서 항상 이맘때쯤이면 손발이 시렵다는 말을 달고 살았었지. 매년 이맘때쯤부터 항상 그래왔지. 옆에 누워서 손이 시렵다면서 내 가슴에 손을 얹고, 발끝이 시렵다면서 내 다리 위에 너의 발을 올려놓았어. 몸이 찬 너와는 ..